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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세.월.호.’ 세 글자, 그렇게 쉽게 쓰지 말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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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창 기자
기사입력 2021-04-19




'한단지보(邯鄲之步)'라는 사자성어가 있다.

한단이라는 도시에 놀러 갔다 온 사람이 자신의 고향에서 한단 사람의 걸음걸이를 보고 흉내 내려 했는데, 이게 한단의 걸음걸이도 아니고 본래 자신의 걸음걸이도 아니어서 사람들의 비웃음만 샀다는 일화로부터 유래된다. 즉, 어설프게 남의 흉내를 내다가는 스스로의 본질마저 잃고 이도 저도 아니게 됨을 이르는 말이다.

최근 화재가 난 남양주의 한 주상복합 단지에 걸린 현수막은 '한단지보'라는 사자성어를 뇌리에 스치게 했다. 화재로 당장 생계가 멈춘 상가 상인들이 내건 현수막은 상인 스스로를 세월호 희생자에 빗대고 있었다. 일사천리 보상이 이뤄지지 않아 답답한 상인들의 심정은 십분 이해한다. 하지만 어찌 감히 '세월호'라는 세 글자를 이처럼 쉽게 은유의 도구로 삼을 수 있을까.

몇날 며칠 화면을 통해 내 가족이 있는 선박이 가라앉는 모습을 가슴 치며 지켜만 보아야 했던, 주검으로나마 가족이 돌아오기를 7년 동안 바라는 유가족들의 심정을 한번이라도 고려해봤다면 본인들의 다급함을 표현하기 위해 '세월호'라는 세 글자를 이처럼 쉽게 이용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나의 상처를 빨리 치료받기 위해 타인의 아픔을 들춰내 이용하는 것은 의도했건 아니건 유가족들에 대한 2차 가해임에 틀림없다.

본인들을 세월호 희생자에 빗대는 것이 사태를 더 빠르게 해결해줄 지도 의문이다. 화재는 누구도 의도치 않았기에 누구도 완벽한 준비가 되어 있을 수 없다. 해당 건설사를 세월호 선장에 빗댄다 한들, 해당 건설사가 더 빠르고 원만한 해법을 위한 키를 제대로 잡을 수 없을 것이다. 즉, 일의 본질만 흐리고 마는 것이다.

일부 사람들의 '세월호' 언급은 사태의 본질을 그르치는 '한단지보'일 뿐이다. 병아리가 안에서 쪼면 어미가 여기에 화답하는 모양을 이르는 것을 '줄탁동시(啐啄同時)'라고 한다. 어려움 극복을 위해 서로 힘을 모은다는 뜻이다. '한단지보'의 경솔함 보다는 '줄탁동시'의 지혜가 일상을 하루라도 빨리 돌려주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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